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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2회] 1.21사태 김신조 무장공비 간첩사건

하늘색약속 2020. 11. 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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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회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1968년 1월 21일 일요일 밤에 청와대 근처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31명의 남자가 출몰합니다. 경찰들과 대치하던 중 돌연 총성이 오가고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는데....

 

곧이어 밝혀지는 바바리코트 무리의 정체는,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 요원들! 그들의 목적을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었습니다.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이라 불리는 '그날'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날' 있었던 사건 때문에 주민등록증이 생기게 됐습니다. 때는 1968년 1월 21일 일요일 밤이였습니다. 대학 입시 전날이자 명절을 열흘 앞둔 '그날'이라 서울 광화문 근처는 아주 평화롭고 고요했습니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온 중3 형기(16세)가 동생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 제과점에서 과자를 사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합니다. 형기가 탄 버스에는 직장인 홍유경(29세)씨가 앉아 있었는데 이분은 교과서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고 새 학기를 앞두고 매일 바빠서 야근을 하고 밤 버스를 타고 갑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윤점순(22세)씨가 탔습니다. 이분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새신부입니다.

 

 

 

그들이 타고 있던 <1813> 번 버스 앞으로 누군가가 오고 있었습니다. 인왕산 아래에 나타난 바바리코트를 입은 의문의 남자들....

2열 중대 31명의 무리가 빠른 걸음걸이와 경직된 표정으로 자하문 초소를 지나갑니다. 검문 중이던 경찰들이 이들을 발견했고 "당신들 뭡니까?"라고 물어보니 " 우리는 cic 대원들이야 산악훈련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니까 까불지 마.

우리는 너희들하고 상대할 사람들이 아니야. "

 

 

 

CIC 방첩부대는 적국의 간첩이나 첩보 활동을 저지하는 부대이고 옛날에는 보안사, 기무사라고 불렀습니다. CIC 부대는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로 권력이 아주 막강했습니다. 뭔가 냄새는 나는데 대놓고 저지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바바리코트자락 안으로 기관탄총이 반짝였습니다. 검문하던 경찰 2명은 무장도 안 하고 있어서 경찰서장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보고를 하고 바바리코트 대원들을 뒤쫓아 갔는데 도착한 지점이 청와대 근처였던 것입니다. 이때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치고 종로 경찰서장이 차에서 내려 그들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나는 종로 경찰 서장이요. 당신들 뭐요?

여기는 내 담당구역이요.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못 지나갑니다."

 

"우리도 간첩 작전 중인데 뭔 말이 이렇게 많소!

궁금하면 CIC까지 같이 갑시다!"

 

서장님은 느낌이 쎄한 촉이 발동했고 부하들한테 31명을 묶으라고 지시를 합니다. 이때 1813번 버스가 하필 그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버스를 군병력으로 오인해서 총을 꺼내 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로 인해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평화로운 일요일 밤 갑자기 황망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바바리코트 괴한들의 정체는 몸이 곧 부기인 북한 특수부대 124 군부대였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박정희 암살! 청와대 습격부터 박정희 대통령 암살까지 4분 만에 올킬할 계획을 가지고 온 겁니다. 일요일에 청와대에 대통령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날짜도 다 맞춰서 계획을 해서 온 겁니다. 31명이 5개 조로 구성되어 청와대 모형물을 만들어놓고 모든 인원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5조는 정문 보초를 못이 박힌 방망이로 살해, 1조는 청사 2층으로 가서 대통령 암살, 2조는 1층 점령, 3조 경호실에 침입과 동시에 살해, 4조 비서실 침입 및 살해, 5개 조가 동시에 침입 4분 만에 끝내기로 북한에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6.25 사건 이후로 간첩 사건은 종종 있었지만 수십 명이 무장해서 청와대 앞까지 내려온 일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때 생긴 말이 무장공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특수부대 라지만 어떻게 31명씩이나 청와대 앞까지 올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작전 개시 4일 전, 북방한계선 북한군 초소에서 31명이 출정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때 상관이 대원들한테 혈서를 쓰자고 제안합니다. 혈서를 쓰고 그날 밤 출정합니다. 비무장 지대를 거쳐서 휴전선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첫 번째 난관에 부딪히는데 바로 3M 높이의 철조망입니다.

 

 

특수부대원들은 철조망을 자르고 티가 안 나게 철조망을 다시 원상복구 해 놓습니다. 임진강은 어떻게 건넛을까요?

때는 1월 중순! 임진강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머리를 흰 붕대로 감고 몸을 흰 천으로 감싸고 최대한 낮은 자세로 조금씩 조금씩 강을 건넙니다.최대한 낮은 자세로 1시간 동안 2~3M만 이동했고 인기척이 들리면 부동자세로 한 시간을 기다리고 기침이 나오면 입에 소금을 넣어 기침을 참았습니다.

 

그리고 이동할 때 원칙은 마을, 도로 이동은 제외하고 오로지 밤에 산악지대로만 이동합니다. 낮에 휴식이 필요한데 이들이 선택한 곳은 바로 무덤이었습니다.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큼 무덤을 파고 시체 옆에서 같이 자는 겁니다.

 

엄동설한에 너무 추워서 무장공비들은 살짝 볕이 드는 곳에 숨기로 합니다. 그곳이 바로 파주 법원리 초리골 뒤에 있는

삼봉산입니다.

 

 

 

쉬고 있는 오후 2시 무렵에 나무꾼 4형제들이 올라오다가 124 대원들하고 눈이 딱 마주칩니다. 자세히 보니가 국군 복장인데 계급장이 없고 기관 탄 총과 실탄으로 몸을 감고 있었습니다. 작전 수행 시 마주치는 민간인은 사살하는 게 철칙이었습니다.

 

"우리의 정체가 탄로 나기 전에 빨리 죽여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이들이 갑자기 배낭에서 오징어와 참깨를 꺼냅니다. 대원들은 북한에서 남조선의 가난하고 배고픈 인민들을 구해줘야 한다고 사상교육을 받았고 당시만 해도 북한의 경제력은 남한보다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북한군들은 나무꾼 4형제를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에 대한 내분이 일어나고 124부대 대원들이 북한 당국에 무전을 칩니다. 북한 당국에서 답변이 왔는데 무전 담당 대원이 암호해독을 못하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집니다.북한의 암호를 한국의 암호해독가가 전문의 지령을 풀었는데 그 내용은 " 원 대 복 귀 "

 

작천 취소 명령이 떨어졌던 겁니다. 이 사람들이 못 알아듣고 끊임없이 청와대로 향하게 된 겁니다. 나무꾼들을 두고 결과가 나왔습니다. 18대 13으로 살려주자가 이긴 겁니다. 이제 남은 건 나무꾼들의 철저한 보안유지를 위해 서약서를 쓰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회유책으로 공산당 입당원서를 씁니다.

 

 

 

우씨 4형제는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를 합니다. 경찰은 신고가 들어와서 도주 예상구간에 병력 배치 및 통제를 하고 있는데 흔적도 없고 찾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이동속도가 너무 빨라서입니다. 30kg 완전군장을 하고 시속 10km로 이동합니다.

 

그렇게 이동하던 무장공비들은청와대를 앞에 두고 경찰들에게 포위됐고 궁지에 몰린 무장공비들은 버스에 사격을 하고

다시 산속으로 숨었습니다. 반격을 위해 대규모 수색작전을 개시합니다. 도망친 공비들 잡느라고 서울 일대를 밤마다 조명탄으로 대낮처럼 만들어 수색하고 전쟁이 난 것처럼 여기저기서 총격전이 벌어집니다.

 

그날 밤 새벽 1시 반쯤에 인왕산 중턱에 개 짖는 소리가 들려서 가보니까 무장공비가 숨어있었습니다. 바위 뒤에 숨은 간첩의 무기는 수류탄 하나였습니다. 과연 공비의 선택은? 당시 27살의 그는 살고 싶다는 생각에 손을 들고 투항을 선택합니다.

 

그 공비 이름이 바로 '김신조'

 

공비들은 대부분 사살되거나 잡혔습니다. 그로부터 2주 후 1월 30일 설날 파주 김 노인 부부 집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서 나가보니 무장간첩이 총구를 겨누고 있었습니다. "이북에서 왔는데 밥 좀 주시오" 김 노인은 공비를 알아보고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돼지고기 찌개와 흰쌀밥을 차려줍니다. 공비는 마음을 열고 집에서 잠에 들었고 김노인 아들은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경찰들이 집 밖을 에워쌌는데 경찰이 실수로 아군에게 총을 발포하는 바람에공비는 자폭을 하게 됩니다. 간첩신고를 한 나무꾼 4형제에게는 정부에서 포상금으로 20만 원을 지급합니다. 1.21 사태 이후 100만 원으로 인상됐고

지금은 5억이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하네요

 

4형제들의 요구사항을 물어보니까 이들은"우리 마을에 전기를 들어오게 해 주시고 마을에 다리를 놔주세요."라고 부탁합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더큰 요구를 할 수도 있었을텐데 마을을 위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순수한 청년들이었나 봅니다.

 

한편 북한 측에서 특수부대 남파 사실을 부인합니다. 김신조 씨는 물론이고 사살되거나 자폭한 대원들의 시신도 인수를 거부했습니다.

 

 

 

 

남한에서 양성한 북파공작원 13,000여 명, 그중 실종 및 사망 7,800여 명, 부상 200여 명, 우리도 끊임없이 보내고 사살당하고 생포당하는 사건들이 계속 발생합니다. 남한에서 북파공작원을 보냈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서 놀랍네요.

 

1.21 사태의 다른 이름이 김신조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에는 엄청난 변화가 생겨납니다. 사건 당시 전군이 제대 보류 , 휴가 중지 , 복무기간 6개월 연장 유격훈련 , 예비군 창설 , 교련 수업 , 반공 웅변대회가 생겨납니다. 호국의식 고취를 위해 이순신 장군 동상이 이때 만들어지고 청와대 경비 강화를 위해 북악 스카이웨이를 이때 건설합니다. 주민등록증도 이때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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