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교양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7회] 무등산타잔 박흥식 근현대 역사의 비극

하늘색약속 2020. 11. 17.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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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7회, 꼬꼬무 7회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희대의 살인범이다.

 

여러분은 기억에 남는 희대의 살인범들이 있나요?

 

영화 추격자에 나온 유영철은 살인의 이유가 여성에 대한 혐오였습니다.  정남규는 쾌감을 느끼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던 인물입니다. 또 다른 살인마 강호순은 호감형 인상으로 부녀자 10명 살해 및 자신의 아내와 장모까지 살해한 인물입니다. 시작부터 살인마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끔찍하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 때문입니다.

 

때는 1977년 4월 20일 그는 대낮에 커다란 쇠망치로 한꺼번에 무려 4명을 죽였습니다. 근데 앞전에 말한 3명의 살인범들과는 다른 유형입니다.

 

    유명 살인마들의 특징

  1. 밤에,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범행
  2. 완전범죄를 위한 치밀한 범행 계획
  3.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범행대상으로 물색

오늘의 살인범은 대낮에 야외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범행 계획, 은폐 시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거기에 범행 대상이 건장한 성인 남성 4명입니다. 

 

 

출처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이름은 박흥식, 23세입니다. 이 남자의 별명은 이소룡, 무등산 타잔으로 괴력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경찰이 묶은 포승줄이 기합 소리 한 번에 끊어졌다고 합니다. 범행이 일어난 무당촌을 근거지로 무술을 수련한 인간병기로 현장에서 무덤덤하게 살인 장면을 재현하고 아는 사람이 보이면 인사까지 할 정도였다 라고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범죄심리학에서 둔기로 머리를 가격했을 때는 깊은 원한에 의한 범행으로 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박흥식은 피해자들에 대한 깊은 원한이 없고 그냥 안면이 있는 정도의 사이였습니다. 

 

박흥식은 왜 원한 관계도 아니었는데 무참하게 그들을 살해했을까요?

 

 

  박흥식은 어떤 사람일까?

 

잔혹한 출근

 

1977년 4월 20일 사건 당일 아침입니다. 30세 김 씨는 출근 준비를 하는데 일하러 가기가 너무 싫었다고 합니다. 자기 직업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있던 김씨는 광주의 구청에서 일하고 있었고 외근을 나가기 위해 동료 7명과 함께 무등산으로 향합니다. 이날 이 점심을 먹은 7명 중 4명은 이 점심이 마지막 식사가 됩니다.

 

그 시각 박흥식은 무등산 덕산골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사실 박흥식은 450M 덕산골에서 가족 여섯 식구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왜 박흥식 가족은 무등산 덕산골 산속에서 살았을까?

 

박흥식의 고향은 전라남도 영광으로 농사꾼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형이 연이어 사망했고 12살에 집안의 장남이 됩니다. 박흥식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이 되어야 했습니다. 다행히도 박흥식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모범생으로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합니다. 근데 수업료조차 낼 돈이 없어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게 됩니다. 당시의 심정을 기록한 박흥식 일기장 내용의 일부입니다.

 

"합격자 발표날 가보았더니 정말로 꿈에 그리던 1등 합격이 사실이었다. 정말 눈물이 나왔다. 실력이 나만 못한 애도 학교를 다니고자 교복을 맞추고 야단인데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시니 학교는 다닐 수 없고 집안은 가난하여 그야말로 풍전등화다. 진학은 포기하였고 중학교에서 주는 교과서를 팔아 차비하여 광주로 떠나왔다."

 

1971년 광주로 이사 온 박흥식은 광주 시내 철공소에 취직합니다. 문제는 여섯 식구 살 집인데 광주 시내에선 집 구할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빈 움막에서 살았는데 쫓겨났고 결국 흙과 돌, 신문지, 밀가루 포대, 헌 양철로 지붕을 얹고 가로세로 3M 정도의 집을 만들었습니다.

 

출처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힘든 상황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돈을 아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합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5개월 만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습니다. 박흥식은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출세의 문 "사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일도 그만두고 하루에 20시간씩 사시 합격을 위해 공부에 매달립니다. 드디어 1차 사법시험에 도전! 다른 과목은 잘 봤지만 영어가 조금 부족해서 첫 도전에 실패했습니다. 

  박흥식의 분노 火

 

1977년 4월 20일 사건이 일어난 그날로 돌아갑니다. 박흥식은 점심을 먹고 땅굴을 파고 있었습니다. 땅굴을 파고 있는 같은 시각 김 씨를 포함한 구청 직원 7명은 손에 망치를 들고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박흥숙의 집을 철거하기 위해 온 구청 건설과 건축지도계 철거반원들입니다. 덕산골에만 무허가 움막이 20여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오랫동안 무허가 움막을 묵인해 왔는데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케이블카를 설치할 예정이었습니다. 게다가 6개월 뒤 광주에서 전국체전이 개최돼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고 광주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움막을 철거하기로 한 것입니다.

 

구청에서는 무허가 움막 철거를 고지하고 이사를 재촉했는데 그들은 달리 갈 데가 없었고 최악의 상황인 철거에 대비해서 땅굴을 파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처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철거반원들의 공무집행이 시작되고 예상했던 일이라 담담하게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철거반원 중 한 사람이 불을 지르려고 합니다. 박흥식은 불은 지르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철거반원들은 결국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집을 부수기만 하면 또 지을까 봐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했다고 합니다. 불타고 있던 집안에는 미처 가지고 나오지 못한 현금 30만 원도 불길 속에서 타들어갔습니다.

 

박흥식에게 이 움막은 집 이상의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향에서 광주로 온 가족들은 집이 없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엄마는 절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고 13살 여동생은 식모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박흥식이 60일 동안 만든 움막집은 좁고 허름했지만 가족끼리 모여서 밥을 한 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둘도 없는 인생의 클라이맥스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집이지만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이 집을 어머니에게 바쳤다."

 

이때 박흥식은 괴로웠지만 참았고 오히려 흥분한 여동생을 달랬다고 합니다. "제발 다른 집들은 불 지르지 마세요." 라며 철거반원들에게 사정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계곡 위쪽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아픈 노인들이 살고 있는 움막이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박흥식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지며 "어떻게 이렇게 개돼지만도 못하게 짐승만도 못하게 대하냐. 우리는 이나라 국민이 아닌 거냐!" 라며 울부짖습니다. 박흥식이 철거반원 5명을 제압했고 철거반원을 끈으로 묶었습니다. 극도로 흥분한 박흥식이 망치를 휘둘러서 4명이 사망, 1명은 중상을 입습니다. 

 

 

출처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그날 왜 이런 참극이 벌어져야만 했을까?

 

가축도 우리에 있고 동물들도 동물원에 들어가서 사료도 먹고 돌봐주는데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날 죽은 피해자들은 대부분 구청에서 고용한 박봉의 일용직으로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무등산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철거는 많이 이뤄졌지만 불까지 지른 적은 없었는데 이날은 상부의 지시로 봐주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사건 직후 지역신문사에 시청 간부들이 몰려와서 절대 불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연이어 쏟아진 신문기사들은 "사이비촌 20대 청년의 발악이 무등산을 피로 물들였다. 박흥식은 무당골에서 가장 뛰어나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수입이 많고 광주 시내에 집을 3채나 샀다."라는 허위 사실을 신문기사로 냅니다. 초반에 박흥식을 소개한 이소룡, 무등산 타잔, 괴력의 소유자 등 언론이 만들어낸 소설이었습니다.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속으로..

출처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정답은 광화문 앞 청계천입니다.

위에서 보면 미로같이 생겨서 일명 미로굴이라고 불렸습니다. 이곳 외에도 용산 판자촌등 70년대 서울 주택의 32%가 무허가주택이었습니다.

 

당시 판자촌에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었을까요? 60~70년대 도시화, 산업화를 통한 근대화사업 때문에 서울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서울에 집이 부족해서 판자촌이 많아진 것입니다.

 

1966년 미국 존슨 대통령이 방한했습니다. 시청 앞 시민들의 환영인사가 언론에 나오는데 판자촌이 카메라에 잡힌 겁니다. 그때부터 도시경관 미화와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서울 외곽에 비어있는 땅으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강제이주시켰는데 막상 가보니까 판자촌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강제이주대책은 실패로 끝납니다.

 

서울의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다른 장소를 물색하는데 그곳은 강남입니다. 1963년까지 강남은 경기도 광주에 속해 있던 곳으로 개발 전 강남은 상습침수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강남에 다리를 건설하고 강북에 있던 주요 시설을 강남으로 옮깁니다. 가장 강력한 유인책 명문 고등학교를 강남으로 이전시킵니다. 그 이후 땅값이 오르기 시작했고 현금 많고 시간이 남아도는 복부인이 등장합니다. 건설사들도 돈을 좇아 강남 개발에 뛰어들었고 강남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납니다.  

 

강남 개발의 엄청난 이권을 만든 주역은 정부 고위직이었습니다. 강남개발 초기 청와대 경호실에서 서울시 공무원을 동원해 강남땅 23만 평을 사들입니다. 23만평을 1년 뒤에 팔아서 남긴 시세차익이 20억, 지금 가치로 6,000억입니다.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밀고 당기고 하는 동안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강남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됩니다.  

 

1963년 강남땅 약 3㎡ (1평) 당 400원 하던 게

1979년 강남 약 땅 3㎡ (1평) 당 400,000원으로 16년 만에 무려 1,000배가 상승합니다.

 

강남 개발을 통해 '개발이 곧 돈이다' '부동산이 최고다'라는 인식이 생기게 되었고 서울 전역에 부동산 광풍이 불게됩니다. 이때 판자촌, 빈민촌을 철거하기 위해 철거용역이 등장합니다.

 

각 나라에서 올림픽 개최를 준비중에 집이 철거된 사람들의 숫자(인구비율로 보자면 서울이 1위)

 

우리 사회가 철거하고 있던 건 집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들의 피눈물로 반죽한 시메트를 발라 그들의 절망만큼 높이 쌓아 올린 콘크리트 건물 그것이 지난 50년 동안 우리 모두가 내 것이길 꿈꾸었던 서울의 아파트이다.

 

그날 이후 박흥식은 경찰에 자수했고 범행을 순순히 인정했고 재판 과정에서도 자신의 죗값을 덜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법원은 박흥식에게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사형을 선고합니다.

 

절대 정당화될 수 없는 범행을 저지른 살인자는 맞지만 그가 분노해서 외쳤던 말을 생각해 보면 그날의 사건이 지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박흥식의 최후 자필 진술서

 

저의 지난날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저의 울분 때문에 아깝게 희생돼버린 그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리다. 미친 정신병자의 개소리라 해도 좋고 빗나간 영웅심의 괘변이라 해도 좋다.

하오나 다음에는 이 같은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죽어가는 몸으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방 한 칸 의지할 데가 없어서 남의 집 변소를 들여다보지 않고 남의 집 처마 밑을 들여다 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지금 말씀드리는 나의 고충 조금이라도 이해하시기 어려우시리라 

 

나는 돼지 움막보다도 못한 보잘것없는 집이지만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허물어진 담장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그들을 보라. 타오르는 불길 속에 발을 동동 구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타까이 허둥대는 그들을 보라. 불쌍하지도 가엽지도 않단 말인가.

 

"움막이 있던 무등산에 묻히고 싶다"

박흥숙의 유연은 끝내 '허가'받지 못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누구나 한번 

피 마르게 아파서 소리치는 때가 있다.

그 진실한 절규를 모은 게 바로 '역사'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작가 조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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