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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9회]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의 배후는 누구일까요?

하늘색약속 2020. 12. 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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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9회, 꼬꼬무 9회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첩보 작전과 관련된 오늘의 이야기

 

1973년 무더운 여름에 사건이 시작됩니다. 일본에서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누군가를 도청하고 미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KT공작단입니다. 한 달 동안 KT의 뒤를 밟으면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그들은 KT가 호텔 22층 스위트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KT가 들어간 스위트룸에는 회동을 함께할 두 명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동을 마치고 복도로 나오는 KT의 목을 낚아채고 공작단의 본부로 끌고 갑니다. KT의

경호원이 달려와서 옆방으로 가보는데 KT도 공작 단원들도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공작단 보스의 정체는 HID 육군첩보부대 소속으로 북파공작원 출신의 현역 육군 대령 '윤 씨'입니다. KT공작을 의뢰한 사람은 윤 대령에게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납치사건이 벌어지기 20여 일전에 의뢰인이 윤대령을 불러서 은밀하게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납치4시간 후 KT를 태운 차량이 오사카에 도착합니다. 자신만만했던 윤 대령은 목격자도 있고 현장에 수많은 증거와 지문을 남겨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유리컵에 남아있던 지문의 주인은 한국대사관의 1급 서기관이었던 것입니다.

 

납치 당일 호텔 추자장의 요원이 수상한 차를 한 대 목격했는데 N사 스카이라인을 탄 차량이 주차요금을 안 내고 도망가자 차량번호를 적어뒀고 차량번호를 조회해 보니까 주인은 한국 총영사관의 부영사 였습니다. 납치의

범인들이 한국 외교관들 이라는 것입니다. 

 

같은시각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 용금호가 떠있습니다. 엔진 고장으로 그 자리에 정박시켜놓은지 열 흘째인데 선원들의 복장이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차림이었습니다. 용금호의 배 주인은 중앙정보부로 비밀 공작선이었던 것입니다. 

 

용금호가 오사카에 온 지 열흘째 되던 날 차량이 한 대 도착했고 호텔에서 납치된 KT의 얼굴과 온몸이 테이프로 감겨진 채 배로 옮겨 실었습니다. 선원들은 KT를 갑판 밑에 있는 비밀창고로 이동시킵니다. 이동 중에 뜯어진 테이프를 교체하기 위해 다가간 선원들은 TK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이 사람은 납치사건 2년 전에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사람이었고 납치사건 25년 후 제 15대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던 겁니다.

 

더보기
암호명이 DJ가 아니고 왜 KT일까요?DJ라는 호칭은 90년대 부터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시절엔 ㄷ을 T로 표기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에 중앙정보부는 KT라는 암호명으로 아주 오랫동안 김대중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원 출신의 민간인 '김대중'을 감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납치사건이 벌어지기 1년전 1971년 4월로 돌아가야 합니다. 47세 김대중이 대선후보로 출마합니다. 그때 여당 후보는 3선에 도전하는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결과는 박정희 대통령의 승리였지만 표 차이가 겨우 94만 표 차이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금권, 관권선거 돈 주고 표 찍고, 투표함 바꿔치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도 불구하고 박정희 53.2% VS 김대중 45.3% 차이로 당선된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간담이 서늘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 무렵 김대중 후보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대선전에는 폭발물이 배달되고 대전 후에는 14톤 트럭이 차로 돌진하는 사고를 당합니다. 이 사고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리를 다쳐 평생 지팡이를 짚고 생활하게 됩니다. 

 

암살설로 인해 다리 치료 겸 일본으로 피신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사이 대한민국에서는 유신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유신으로 달라진 것들은 

국회해산, 정치 집회 활동금지,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대통령 직선제 폐지가 있습니다. 이후 1987년 6월 민주 항쟁 결과로 16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됩니다. 

 

10월 유신이 공표가 되고 전국이 얼어붙습니다. 일본에서 이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박정희와 유신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정권에서는 눈에 가시인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움직였던 것입니다.

 

73년도 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 부장입니다. 이후락 정보부장의 지시로 KT공작 단장이라는 직책을 윤 대령에게 부여합니다. 김대중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곧 있으면 출국할 예정이라 비교적 활동하게 쉬운 일본에서 급하게 납치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윤단장은 배에 타지 않았다?

당시 윤단장은 고민이 많았습니다. KT 공작 계획안의 2가지 방안 1번. 일본에서 제거한다. 2번. 비밀리에 한국으로 데려온다. 두 가지 계획안인데 상부에서는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말만 남깁니다. 

 

팀원으로 모집한 사람들은 중앙정보부장 조카사위, 중정 사위, 청와대 비서관 친동생 등등 전부 상전들이고 신원은 확실하지만 아마추어들이었습니다. 공작이 잘못되면 윤 대령이 독박을 쓸 것 같아서 결국 배에 타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는 8월 말복더위로 밀폐된 공간에 테이프로 칭칭 감겨 있었으니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겠죠. 그러던 중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배 안은 난리가 난 소란 통에 선원 한 명이 자신 곁으로 다가와 "선생님 됐습니다"라는 한마디를 전합니다.

 

김대중은 미국이 비행기를 보내 자신이 살게 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비행기가 온 것인지, 왔다면 정말로 미국 비행기가 온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건 미국CIA에서 김대중의 찾기 위해 수소문했다는 것은 확실한 정보라고 합니다. 김대중의 호주머니에 넣어져 있던 쪽지에는 "애국청년구국대"가 김대중 납치 사건을 벌였다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대중은 이틀간 감금되었다가 납치범들의 차를 타고 김대중의 집 앞에 도착합니다. "또 납치될 수 있으니 나라에서 경호하겠습니다." 집에 울타리를 치고 언론과 사회 접촉을 막고 수사도 상상초월로 어마어마하게 했습니다. 

 

차량 7800여대 조사, 주차장 2,056군데 동교동 주민 109명 조사, 선박 70척을 조사했다고 자료에는 기재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작 일본에서 흔적을 남긴 공무원에 대한 수사는 일본에서 수사를 요청하면 한국에서 직접 수사하겠다고 하고서는 1년을 끌어서 관련된 공무원들은 혐의 없음 등으로 종결됩니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처벌받지 않고 해임만 당합니다. 결국엔 이 사건으로 단 한명도 처벌받지 않고 이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2004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진상을 밝힐 수 있을까 했는데 KT공작 계획서라고 적혀있는 종이 한 장도 발견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신과 발신 기록만 있고 정확한 내용이 기재된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KT공작 단장 윤 대령이 남긴 말 : "요원의 임무는 민간이 되어도 말하지 않는 게 철칙이지만 나도 이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고 싶습니다. 내가 KT공작단의 단장이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현지에서 어쩔 수 없이 명령을 실행할 수 밖에 없는 분들이 현지 실정과 여러 가지 인간적인 고뇌와 고통 속에서 처음 지시와는 달리 DJ를 납치해서 배에 실어서 보냈다고 확신을 합니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살아 돌아온 김대중.. 이 사건에 대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모두 다 용서하기로 했다. 보다 밝은 미래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어떠한 보복이나 형량은 절대 배격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생전에 바람은 끝내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 지시했는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 씩 떠나가고 우리는 그 진실을 짐작하여 추측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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