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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8회] 전국구 조폭시대의 최후 서진회관 룸살롱 사건

하늘색약속 2020. 11. 21.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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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8회, 꼬꼬무 8회 리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산골 분교의 키다리 아저씨 고금석

 

때는 1989년 강원도 정선 산골에 하나뿐인 아담한 초등학교로 28명의 학생들이 항상 기다리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키다리 아저씨가 보내주는 편지와 매달 5만 원의 학용품입니다. 어느 날 키다리 아저씨가 아이들의 소원을 물었고 아이들은 바다에서 물장구치며 놀고 싶다고 했고 키다리 아저씨는 8월 12일에 해운대로 초대한다고 답장합니다. 

 

출처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그런데 키다리아저씨의 편지가 그날 이후로 끊겨버렸습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부산 해운대의 절에 스님에게 전화 한 통이 옵니다. 통화를 마친 스님이 주저앉아서 펑펑 울고 있습니다. 이 스님이 누구냐 하면 삼중 스님입니다. 이분은 바로 사형수의 아버지라고 불리시는 분입니다. 50년 넘게 교도소에서 총 300명 넘은 사람들의 마지막을 지켜주신 분이십니다. 삼중 스님을 슬픔에 빠트린 전화 내용은 "고금석의 사형이 내일 오전 서울구치소에서 집행됩니다."

 

사형수의 이름은 고금석, 나이는 25살

삼중스님은 전화를 받자마자 택시를 타고 서울구치소로 향합니다. 고금석은 삼중 스님에게 유언으로 "아이들의 바다여행을 위험하지 않게 옆에서 잘 지켜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바다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사형이 결정된 것입니다.

 

 전국구 조폭시대의 최후 - 서진 룸살롱 사건

 

여러분은 서진 룸살롱 사건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1986년 강남 한복판에서 무려 4명이 잔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광복절 전날 서울을 핏빛으로 물들인 조폭들의 칼부림 사건입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안석호 형사님은 그 당시 김대두 이후에 강력사건으로는 최대의 흉악범이라고 증언합니다. 

 

키다리아저씨의 정체는 바로 조직폭력배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조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영화에서 봤던 칼부림하는 이미지들이 많습니다. 근데 조폭 영화에 이런 칼부림 장면이 등장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서진룸살롱 사건 때문이라고 합니다.

 

  • 조폭1기 낭만파 주먹 시대 : 일제강점기 시대 김두한, 스라소니가 활약했던 주먹이 무기였던 시대

 

  • 조폭 2기 정치깡패 시대 : 이승만 정권에 주먹과 정치가 결합니다. 지저분한 일들은 건달들한테 맡기고 주먹은 정치의 비호를 받았습니다. 대표적 정치깡패로 이정재, 임화수 등이 있습니다.

 

  • 조폭 3기 70~80년 전국구 조폭 시대 : 지방 조폭이 상경해서 서울의 패권을 다투던 시대로 이때부터 칼이 등장합니다. 당시 서울은 조폭 3대 패밀리가 장악을 했습니다. 조양은의 양은이파, 김태촌 범서방파, 이동재 OB파 세 조직이 서울의 밤을 지배했습니다. 이 세 조직은 모두 다 호남 출신으로 국토개발이 주로 영남 쪽으로 치우쳤고 호남은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서울로 올라오다 보니까 호남 출신 조직이 서울을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흥할때가 있으면 망할 때도 있는 법.

결국 막을 내리게 되는데 그 원인이 된 사건이 바로 서진 룸살롱 사건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범죄로 꼽히는 서진 룸살롱 사건 그날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때는 1986년 8월 14일 밤 11시 30분 사당동의 한 정형외과에서 야간 당직 중이던 간호사 박 씨는 이날 평생 잊지 못할 악몽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20대 건장한 남성들이 피투성이 된 남자들을 병원에 내려놓고 도망칩니다. 상태 확인을 위해 환자들에게 다가갔는데 그들은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습니다. 숨진 사람들은 모두 4명으로 시신에 온통 칼에 찔린 자국들이 있었는데 어떤 시체는 무려 40여 군데에 자상이 있었습니다. 광복절 아침 이 사건은 대서특필됩니다. 시신을 업은 사내들이 들어오기 1시간 전입니다.

 

출처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강남 역삼동에 있는 서진 회관 지하1층입니다. 당시 22살 이었던 고금석은 서진회관 16호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맞은편 20호실에서도 일행들이 있었습니다. 서진 회관이 이들한테는 아지트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조직은 훝날에 서울 목포파로 불립니다. 목포 출신 고향 선후배 사이었고 경찰 관리 대상에도 오르지 않을 정도로 신출내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이곳에 온 17호실에 또 다른 조폭들이 자리했고 이들은 술이 많이 취한 상태로 웨이터에게 술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킵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심부름 보낸 웨이터가 나타나지 않자 기분이 슬슬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화장실 바로 옆방에 방도 좁아서 웨이터에게 방을 바꿔달라고 요청했고 방이 없다고 하자 한대 쳐서 코피가 납니다.

 

웨이터는 울면서 복도에 있었고 이때 16호실에서 호출이 와서 방에 들어갔습니다. 16호실에 있던 고금석 일행은 웨이터를 통해 17호실에 범서방파 조직원들이 있다는 것을 듣게 됩니다. 

 

고금석하고 다른 조직원 하나가 화장실에 들렀다가 룸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17호실에서 범서방파의 조직원이 나오고 복도에서 딱 마주치게 됩니다. 이 사람은 키 190cm 체중 100kg 헤비급 복서 출신으로 유명한 싸움꾼이었습니다. 17호실에 있던 사람들은 김태촌의 범서방파의 방계조직이었던 맘보파였던 것입니다. 

 

더보기

여기서 잠깐!

폭력 조직의 이름은 누가 지을까요?

바로 경찰, 검찰이 이름을 짓는다고 합니다. '범죄단체조직죄'가 형량이 엄청 세서 조직에 소속만 돼도 징역 2년 이상입니다. 두목은 사형까지 처벌이 가능합니다. 

 

전국구 조직 맘보파 행동대장이 서울 목포파의 2명과 룸살롱 복도에서 딱 눈이 마주친 거죠. 고금석은 눈을 피하지 않았고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맘보파 행동대장은 화가 나서 고금석의 따귀를 때리고 주먹질을 시작하지 고금석이 참지 못하고 싸움이 시작됩니다. 17호실에 있던 맘보파 조직원들과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까지 가세해 복도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출처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사실 서울 목포 파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으로 같은 대학 유도 선후배였습니다. 이들을 조직원으로 끌어들인 건 선배 장 씨로 사무라이 문화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나중에 장 씨의 방에서 사무라이에 관련된 책들이 무더기 발견됩니다. 단순한 동경에 그친 게 아니라 세력을 모으고 목표는 전국 조폭계를 정화한다는 목표로 조직원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서울 인근 야산에서 싸움의 기술들을 훈련하고 청부해결사로 실전에 돌입합니다. 혹시나 보복할까 봐 전 조직원이 합숙 생활을 하고 야구방망이와 칼을 항상 지니고 다닙니다.

 

 맘보파 행동대장의 이름값에 눌린 목포파 행동대장이 발목에 있던 칼을 꺼내 들고 룸살롱 복도는 순간 얼음이 됩니다. 먼저 움직인 건 서울 목포파의 행동대장으로 칼로 맘보파 행동대장의 팔과 다리를 찌르기 시작합니다. 트렁크에 있던 야구방망이 칼로 무장하고 그들의 칼부림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그날 맨 앞에서 칼을 휘둘렀던 사람이 고금석으로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피를 보는 순간 눈이 뒤집혀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고금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고금석이 이런 행동들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은 믿지를 못했습니다. 산골 분교의 키다리 아저씨였던 고금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고금석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면 범죄자들은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이었던 경우가 많은데 고금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고 마을에서는 칭찬이 자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대학 가면서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고 아르바이트로 신문배달, 옥수수 판매를 합니다.

 

서울 자취방에 고향 선후배들 중에 선배 장 씨가 고금석을 눈여겨보고 소개로 처음 가게 된 곳이 천호동 나이트클럽이었습니다. 카운터를 보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일로 기존 알바와는 차원이 다른 액수를 받게 됩니다. 

 

출처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그러던 어느 날 선배의 전화 한 통으로 달려간 곳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선배들이 흉기를 들고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고 얼떨결에 그도 싸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싸움이 끝나고 선배들에게 엄청 큰돈을 받게 됩니다. 돈의 달콤함을 맛본 고금석은 점점 조직의 세계에 스며들게 됩니다. 서울로 올라온 지 몇 년 만에 순수했던 섬마을 소년은 흉악한 칼잡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에도 조폭들끼리 칼부림은 가끔 있었는데 이렇게 잔인한 사건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뉴스를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서울 목포파의 조직원과 고금석은 자수하게 됩니다. 대부분이 사형선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습니다.

 

출처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출처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그런데 이 사건이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불러왔고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정치적으로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윤석양 이병이 국군 보안사령부가 민간인 1300명을 불법 사찰하고 있다고 양심선언을 합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대통령 특별지시로 경찰 16,000명을 충원하고 하루 16시간 이상 근무, 이때 순직한 경찰 126명, 부상 2,200명으로 그야말로 진짜 전쟁이었습니다. 그 결과 조직폭력배 274개파가 소탕됩니다. 1,421명 검거 1,086명이 구속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목포 파는 목표대로 대한민국 조폭계를 정화시키기로 한 것을 이뤄냈고 80년대 전국구 조폭 시대를 끝낸 것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고금석은 불교에 귀의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곳에 보내달라고 천일 동안 삼천배 기도를 합니다.

 

그때 당시의 심경이 담긴 고금석의 옥중편지입니다.  

 

"새벽 1시에 일어나 예불과 추위를 이기며 3시간 동안의 좌선을 하다 보니 귀에 동상까지 걸리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자신도 많은 이들의 충고를 무시고 아집과 아만으로 꿈이 물들어 모든 것을 나의 마음대로 될 것같이 법을 무시하고 한 마리 야생마 같이 날뛰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철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생명이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파리, 모기에 시달려도 죽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으니까요."

 

죄를 저지르고 사죄하는 그의 모습만으로 고금석이 저질렀던 살인이 정당화될 순 없습니다. 모든 것은 고금석의 선택이었고 서진회관에서 마주친 맘보파 행동대장에게 객기를 부리지 않고 참고 넘어갔다면 이렇게까지 큰 사건으로 번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무릎이 까질 정도로 삼천배를 드려 죽은 사람들을 위해 회개하는 모습을 모인다고 한들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요.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동으로 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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