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역사저널 그날 1화 : 조선22대 왕, 정조 :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하늘색약속 2020. 12. 1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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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저널 그날 1화 : 조선 22대 왕, 정조

 

1776년 4월 27일, 그날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즉위식이 있었다. 그의 나이 25세,

할아버지인 선왕 영조의 강력한 지지로 오를수 있었던 왕의 자리. 

그러나 조선 땅 누구도 정조가 무사히 왕위의 자리에 오르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서슬퍼런 세월이 있었다.

 

평생 영조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사도세자

부자간의 극심한 갈등은 조선사의 유례없는 끔찍한 죽음으로 끝난다.

죄인이 되어 폐세자로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

 

극심한 당쟁의 한가운데 죄인의 아들로 왕세자가 된 어린 정조.

마침내 즉위식 그날 앞날을 예고하는 일성이 있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 죄인의 아들 왕이 되다.

 

영조, 정조는 정비 출생이 아니라 후궁의 출생이다. 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라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왕의 건강이 좋지 못해서 이지 않을까 라는 말들이 있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아주 어린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고 점점 아버지의 기대수준이 높아지고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것에 압박으로 인해 돌아가시기 전에 정신병이 있었던 것으로 학회에서는 보고있다고 한다.

 

사도세자에 대해서 논란이 많이 있다. 한쪽에서는 훌륭한 왕이 될 만한 인재였다. 한쪽에서는 심각한 정신질환자라는 말이 있는데 두 가지가 다 있었다고 본다.

 

영조와 정조는 특별히 사이가 좋았다?

아들에게 못다한 사랑이 손주에게 이어졌다라고 볼 수 있다. 귀한 아들이었기에 잘해보려고 했는데 서로 사이가 안 좋아 졌기에 더욱이 손자인 정조에게 사랑을 더했다고 볼 수 있다. 영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절박함이 있을 수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에게 조선이라는 나라가 달려있다라는 절박감이 있을 수 있다. 

 

 

정조 암살 미수사건

 

정조 즉위 1년 후 어두운 그림자가 궁궐에 숨어든다. 정조가 홀로남아 독서하던 늦은시각 왕의 침실에 들이닥쳤고 왕의 맞닥드리게 된다. 판관과 궁녀, 군관까지 연루된 조직적 암살시도는 모두 7차례나 이어진다.

 

경희궁 조현각에 머물렀는데 이곳이 개방적이어서 자객이 침입하기 용이했던 위치였다. 그리고 침입했던 사람들은 정조의 왕위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고 한다. 정조 즉위시 주변에 친세력보다는 적대세력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본권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시기였다고 한다. 암살 미수사건 이후에 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뒤에도 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정조는 독서, 무예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결국 자신을 지켜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왕이 아니었나 싶다. 정조의 활솜씨는 여러 기록에 나와 있는데 탁월했다고 한다. 어느정도냐면 행사가 있을때 활쏘기를 겨루면 무인중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과 겨뤄도 배가 차이가 날 정도로 활솜씨가 탁월했다고 한다.

 

암살기도의 범인은 잡혔을까?

홍계희 라는 인물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정조 초년에 처벌을 받았다. 그의 아들이 주도해서 자객을 궁중에 침입을 시켰다.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영조의 2번째 왕세자 였던 사도세자. 노론은 아버지의 분노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비극을 동조하고 방관했다. 영조의 즉위를 돕고 붕당정치의 승리자가 되었던 노론.

52년간의 재위기간동안 더욱 견고해진 세력은 왕권보다 강하게 조선을 지배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신하들은 평생 정조를 위협한다.

 

정조가 적극적인 복수를 하지 않은 이유는?

정조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고 힘을 비축하기 상당한 시간 공을 들였다고 한다. 영조를 지지하는 세력과 세도세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달랐는데 정조는 껄끄러운 세력들을 다 끌어안고 탕평정치를 이끌었다.

 

출처 : KBS 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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