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역사저널 그날3화 :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돌이킬 수 없는 부자관계

하늘색약속 2020. 12. 2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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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5월 15일 흥성대원군이 향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대원군으로 세상을 호령하던 최고의 권력가였던 그는 죽기 직전에 고종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고종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는대요. 흥선대원군의 장례식날이 있기까지 부자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무엇이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고종, 아버지 장례식 불참 사건의 시작은?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는데 고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시대적으로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하고 있을 때 준비가 안되어 있을 시기에 철종이 급작스럽게 죽음으로써 고종이 왕위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서울 도심한복판에 자리한 흥선대원군의 저택 운현궁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궁궐보다 더 큰 위세를 자랑하던 격동의 공간이었습니다. 운현궁의 사랑채 노한당은 아들 덕에 좋은 집에 살게 되었다는 흡족함이 뭍어나는 곳입니다. 대원군은 이곳에서 왕인 아들을 대신해 서원철폐, 경복궁 증건등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과 개혁정치

 

흥선대원군이 정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정책들로는 서원철폐, 비변사 폐지, 사창제 실시, 호포법 실시등이 있습니다.

 

서원정리 : 붕당의 근거지였던 서원을 철폐. 양반 지배층의 수탈을 억제

비변사 폐지 : 세도정치 타파를 위해 당시 국정 전반을 총괄한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 부활

사창제 실시 : 환곡(봄에 곡식을 빌렸다가 가을에 이자를 붙여 갚는 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저리로 곡식을 빌려주는 대여기관 설치

호포법 실시 : 군역을 대신해 나라에 내던 세금을 양반에게도 징수

탕평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흥성대원군은 남인, 북인, 소론, 서북인까지 등용하면서 고르게 인재를 등용하려고 했습니다.

 

부자 갈등의 가장 큰 요인은 고종이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에게 간섭을 받는것에 자아성찰을 하게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생겼을 것이라고 봅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야 했던 적기는 고종이 20살 때 물러나 줘야 했었던 것입니다. 

 

국제정세도 한 몫을 했는데 마침 청나라에서 동치황제가 섭정을 하고 있었는데 동치황제가 18세에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고종보다 나이도 어린 동치황제가 친정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서 고종도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고종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속에서 조선도 고립에서 벗어나 근대화된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명을 이뤄야 된다는 생각을 키워나갔습니다. 고종이 친정을 원한 이유중에는 개인적인 욕망 때문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척사정책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계기는?

 

최익현 상소문중에 "친친의 반열에 속한 사람은 다만 지위를 높이고 녹을 많이 주되, 국정에는 관여하지 말게 하십시오." 라는 상소문을 올립니다. 흥선대원군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집요하게 아들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재선 서자를 왕으로 세워보려는 움직임과 고종의 조카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사건이 있었지만 전부 실패하게 됩니다.

 

1882년 7월13일 중국 천진으로 향하는 한 척의 군함에 온몸이 묶인채 지친모습으로 납치당하던 흥선대원군이 있었습니다.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했고 신식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의해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양반으로 이루어진 별기군과 구식군인들이 차별을 받았고 구식군인들의 폭동이 확대되어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종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동조하기 시작했고 고종은 결국 흥성대원군에게 임오군란의 사태수습을 요청하게 됩니다.

 

권좌에서 물러난지 9년만에 아들의 개화정책을 원점으로 돌리며 사태를 수습해 갔습니다. 하지만 정국 수습에 나선지 33일째 되던날 흥선대원군이 임오군란의 주모자라면서 청나라에 강제압송 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일국의 권력자로서 한시대를 풍미한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후 청국의 포로로 전락했고 낯선 이국땅에서 그후로 3년 1개월동안 조선땅을 밟지 못한채 그곳에서 분노와 한을 삭여야만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주모자로 임오군란을 일으켰다기 보다는 우연한 계기로 일어난 사건을 흥선대원군이 이용했다라고 보는 것이 맞을것 같다고 합니다. 3년 1개월 만에 흥선대원군이 귀국한 후 고종은 아버지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는 명령을 내립니다.  

 

조선시대 왕과 아들 관계는 생각보다 부자간 갈등이 많았습니다. 태조와 태종, 인조와 소현세자, 영조와 사도세자 이렇게 대체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원만하기 보다는 갈등관계가 많았습니다. 

 

을미사변 :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살해한 사건

 

사변이라고 할 만큼 있을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을미사변에 또 한번 권력의 중심에 들어설 뻔 했었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을미사변 연루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을미사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편에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자료출처 : 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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