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역사저널 그날 4화 : 을미사변 명성황후와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하늘색약속 2020. 12. 2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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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 성난 군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합니다. 구식군대와 신식군대의 차별과 1년넘게 급료를 받지 못한 것이 폭발한 것입니다. 분노한 군인들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왕비 명성황후였습니다. 구식군대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왕비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왕비는 혼란을 틈 타 모습을 감춰버립니다.

 

고종은 고심끝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불러들입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왕비의 국상을 선포하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왕비의 시신을 찾기는 커녕 행방조차 묘연한 상태여서 시신대신 왕비의 옷으로 장례를 대신합니다. 

 

난중에 사라진 왕비는 정말 숨진걸까요? 사라진 왕비와 시신도 없이 장례를 강행한 대원군..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명성황후는 무관 홍재희의 도움으로 장호원으로 피신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죽음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국상을 선포한 이유는 있을 수 없는일로 대신들도 국상을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대원군이 명성황후의 국상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국상선포 그날의 의미는?

 

국상선포는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되는 원인이 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일본과 청나라 등 외세의 개입을 불러온 아쉬운 그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누구?

 

나름 명문가 인현왕후의 집안인데 막상 그녀 자신의 아버지는 크게 활약을 했던 사람은 아닙니다. 조선시대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이렇게 세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명성황후를 밀어준 건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여주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아가씨를 인현왕후가 살던 곳에서 살게해주고 인현왕후의 이미지를 입혀준 것이 흥선대원군입니다. 당시 세도가문의 득세를 우려해 흥선대원군 처가의 가문에서 왕비를 뽑는게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1871년 왕실에 경사가 찾아듭니다. 혼례를 치른지 5년만에 비로소 명성황후가 회임을 한 것입니다. 이 소식은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도 전해졌고 그해 11월 원자를 낳게됩니다. 하지만, 원자에게는 쇄항증(항문이 막힌채 태어나는 현상) 이라는 병을 얻게되었고 결국 숨을 거두게 됩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보낸 산삼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뒤인 1874년 명성황후의 양오빠 민승호의 집에 의문의 상자가 배달됩니다. 민승호는 상자를 열었고 상자는 열자마자 폭발해 이 사고로 명성황후의 친정가족 전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이 역시 대원군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삼사건은 야사나 소설에만 나오는 이야기라고합니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요?

 

1873년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끝내고 자신이 직접 정사를 돌보기로 결정하는 친정선포를 하게 되는데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자기편을 들어주리라 기대했다고 봅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이 변한것이 며느리가 뒤에서 조종했다고 생각했고 사실 타깃은 아들인데 직접적으로 아들을 공격하지는 못하고 며느리를 향한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종을 대신해 섭정을 맡은 흥선대원군은 처남인 민승호를 비롯해 민씨를 요직에 등용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권력다툼에서 고종의 편에 섭고 명성황후의 비호아래 민씨들은 개화정책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권력의 정점에 선 민씨는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백성들로 부터 원성을 사게됩니다.

 

한 나라의 왕비로 새로운 문물과 나라밖 사정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명성황후는 평소 외국인들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이들은 명성황후에 대해 무척 호의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 "명성황후는 누구보다도 국익을 위해 헌신한 유능한 외교관이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우아함과 보기드문 지식과 박식함에 놀랐습니다"

 

한편, 당시 조선인들은 명성황후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매천야록에 황현은 명성황후를 국고를 탕진한 여자라 비판했고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은 "우리 왕비는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입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더 나쁩니다."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던 명성황후 무엇이 그녀의 진정한 모습이었을까요?

 

일본이 명성황후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외교력에 영향력을 끼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명성황후 호칭논란

 

우리나라에서 본디 왕비를 앞에 성을 붙여 부르지는 않습니다. 살아있을때는 왕비고 중전입니다. 민비는 아주 잘못된 표현으로 일본식 호칭이라고 합니다. 명성황후는 돌아기시기 전까지는 명성왕후가 맞습니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명성황후가 된 것입니다. 

 

베일에 싸인 명성황후의 얼굴은 진위논쟁이 상당합니다. 지금까지 명성황후라 알려진 사진은 모두 세 장인대요.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명성황후로 소개된 사진입니다. 하지만 명성황후를 모셨던 상궁들은 이 사진이 진짜가 아니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언더우드의 책에 소개된 사진인데요. 언더우드는 이 사진에 정장을 갖춰입은 한국여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채 머리를 하고 부채를 든 사진은 궁녀로 소개된 사진입니다.

 

1895년 10월 8일 고요하던 궁궐에 들이닥친 일본인들의 손에 명성황후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시각 뜻밖의 인물이 궁궐에 들어오는데 바로 흥선대원군입니다. 사건 다음날인 10월 9일 한성신보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립니다. 왕비 살해 사건의 배후에 흥선대원군이 있음을 암시한 기사였습니다.

 

왕비가 살해당한 참혹한 순간에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은 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요?

 

사실 그 당시에 일본은 을미사변을 대원군의 소행으로 밀고 가려고 했습니다. 을미사변때 흥선대원군이 궁궐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을미사변을 벌였을지 까지는 확실치 않은 것입니다. 

 

가장 신빙성이 있는 이유는 손자에 대한 위협에 못 이겨서 을미사변 현장에 가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궁궐 입궁을 권유하는 일본인과 실랑이 속에서 두 시간을 지체한 흥선대원군으로 인해 해가 밝아져서 사람들 눈에 일본의 소행임이 탄로 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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