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역사저널 그날6화 : 성삼문 단종복위운동, 세조의 업적

하늘색약속 2021. 1. 2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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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문의 단종복위운동 , 세조의 업적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은 형인 문종이 즉위 2년 4개월만에 세상을 떠나자 숨겨왔던 야심을 드러낸다. 어린조카의 왕위를 노린 하룻밤의 반정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1년후 1455년 조선왕조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은 왕자가 즉위식을 위해 옥새를 받았다. 옥새를 받든 것은 놀랍게도 단종의 충신으로 기록된 성삼문이다. 충심으로 단종을 모시던 신하들의 비극이 예고된 그날, 수양대군은 조선의 7대왕 세조가 된다.

 

 

단종복위운동의 시작과 끝

 

성삼문은 초반에는 수양대군에게 협조를 했는데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는 그날에는 반란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넘겨줄 때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성삼문이 중심이 되어 집현전에서 동문서학했던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이 모여서 1456년 6월에 단종복위운동을 시도한다. 결과적으로 단종복위운동은 실패를 하게 되는데 한명회의 놀라운 촉으로 인해 어이없는 실패를 하게 된것이다.

 

명나라 사신 환영연이 벌어지는 거사의 날에 한명회는 별운검으로 지명된 유응부와 성승이 주도하는 별운검을 빼자고 건의했고 세조가 이를 받아들인다. 별운검이 빠지게 되면 단종복위운동은 시도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다. 단종복위운동이 시도도 못해보고 끝이나자 성삼문은 거사를 미루기로 했는데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던 김질이 세조에게 알리는 바람에 이후에 끔찍한 복수전이 시작됐다.

 

성삼문외 사육신들은 고문을 받으면서 세조를 나으리라고 호명하고 녹봉을 나으리가 준 것은 하나도 먹지 않았다는 말을 해서 세조의 화를 돋우었다고 한다. 성삼문은 사지를 찢어죽이는 능지처참을 당했고 부녀자들은 원수의 집안의 노비로 보냈다. 이 당시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시신을 찾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하니 세조가 얼마나 끔찍하게 고문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죄인의 신분인 되어 16살에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떠났다. 유배간지 17살이 되던해에 금부도사가 단종을 찾아온다. 세조가 내렸다는 사약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야사의 기록이 있는데 그가 어떻게 역사속에서 사라졌는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단종은 유배를 간 영월에서 외롭고 슬픈 처지를 시조로 호소했다.

 

 달 밝은 밤 소쩍새 슬피우니 

시름 못 잊어 자규루에 기대었네 

네 울음 소리 내 듣기 괴롭구나

그 소리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세상에 괴로운 사람에게 내 마음을 전하노니

춘삼월 자규루엔 오르지마오

 

- 단종 -

 

<절친한 벗에서 적으로 돌아설 수 밖에 없던 성삼문과 신숙주 영정>

 

성삼문과 신숙주

 

왕권을 둘러싼 삼촌과 조카의 대립에서 대척점에 서있던 절친했던 성삼문과 신숙주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충의가 성삼문-

 

큰 운수 중도에 막히어 국정이 바르지 못하였네

권간들이 어지럽혀 국병을 휘두르느

악과 독이 틈을 타서 불붙듯이 번지었네

-신숙주-

 

성삼문은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한 사육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충심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의 뒤어난 학자였고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에 기여했다고 한다.

 

신숙주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로 6명의 임금을 모시고 영의정을 지냈으며 4차례 공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1438년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에 모두 합겼했으며 이듬해 시행된 친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 벼슬길에 올랐다. 뛰어난 학자였던 신숙주는 일찍이 그 재능을 인정받아 집현전 부수찬, 응교, 장령, 집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직제학 등을 두루 역임했다. 

 

성삼문은 답답하리 만치 정도를 걸으려 했던 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 오죽하면 성삼문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당신들은 새 임금 만나서 천하를 태평하게 하라. 나는 옛 임금 만나러 지하로 가겠다."는 말을 내뱉는다. 오죽하면 세조는 자신을 반대했던 성삼문을 죽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난신(나라를 어지럽힌 신하)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의 이름으로 불릴 것" 같다. 성삼문의 호가 매죽헌인데 호는 이미지와 잘맞는다.

 

사육신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성상문, 하위지,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이개만을 이야기하는데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된 사람은 70명이 넘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세조의 업적

500년이 지난 지금도 세조는 여전히 논쟁적인물로 남아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피의군주였으나 한편으로는 아버지 세종의 업적을 잇는 유능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권력을 향한 강렬한 욕망은 피바람을 몰고왔으나 동시에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세조실록은 부국혁명을 꿈꾼 세조의 다양한 업적을 전한다. 호패제도를 강화해서 이를 통해 군사자원을 관리하고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했으며, 다양한 분야의 편찬 사업을 추진하여 조선 초기 문예 르네상스를 이어갔다. 특히 최초로 조선의 통치규범을 정리한 경국대전은 세조의 업적 중 가장 의미있게 평가되는 부분이다. 또 민생을 돌보기 위해 퇴직 관리에게도 지급하던 토지를 현직관리에게만 주도록 한 직전법은 획기적인 구조조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조의 말년

가족력과 스트레스로 인해 말년에는 심한 피부병을 앓았다고 한다. 즉위 당시 나이가 39인데 집권기가 13년 밖에 되지 않는다. 스스로 호불군주라 칭하고 재위기간동안에 있었던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한 치유를 불교에 귀의해서 치유해 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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